지난 3일 발령된 비상계엄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인 체포를 지시했는지를 놓고 6일 국가정보원 서열 1·2위가 진실 공방을 벌였다.
정보기관의 수뇌부가 대통령에 관한 정반대 주장을 펴고, 이게 언론에 실시간으로 공개되는 유례를 찾기 힘든 풍경이었다.
홍장원 국가정보원 1차장은 이날 신성범 국회 정보위원장과의 면담에서 윤 대통령이 계엄 선포 직후인 3일 오후 10시 53분쯤 전화를 걸어 “이번 기회에 싹 다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해”라며
“국정원에도 대공 수사권을 줄 테니 우선 방첩사령부를 도와서 지원해. 자금이면 자금, 인력이면 인력 무조건 도우라”고 말했다고 면담에 배석했던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전했다.
조태용(왼쪽) 국가정보원장이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신성범 국회 정보위원장 면담을 마친 후 승강기에 탑승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남우 국정원 기조실장. 뉴스1
윤 대통령과의 통화 이후 홍 차장은 여인형 방첩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윤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전달했고, 여 사령관은 체포 대상자 명단을 홍 차장에게 불러주며 검거를 위한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요청했다고 홍 차장은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홍 차장이 신 위원장에게 밝힌 체포 대상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민주당 김민석 수석최고위원, 박찬대 원내대표, 정청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유튜버 김어준씨, 김명수 전 대법원장, 김민웅 촛불승리전환행동 상임대표, 권순일 전 중앙선거관위원장 등 13명이었다.
김병기 의원은 “(명단은) 홍 차장이 기억하는 순서”라며 “또 한 명의 선관위원을 불러줬는데 (홍 차장이) 기억을 못 한다고 했고, 한국노총인지 민주노총인지 모르겠지만 노총위원장 1명이 기억난다고 했다”고 전했다.
홍 차장은 여 사령관의 말을 들은 뒤 “‘미친 X로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부터는 메모하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여 사령관은 “1차, 2차 검거 대상을 순차적으로 검거할 예정이며 (경기도 과천) 방첩사에 있는 구금시설에 구금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했고,
홍 차장은 “알았다”고 하고 통화를 마쳤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홍 차장은 전화를 끊으면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홍 차장의 주장을 종합하면 윤 대통령이 홍 차장에게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를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라고 명령한 셈이 된다.
홍 차장은 이러한 명령을 받은 뒤 지시 사항을 일절 이행하지 않았고, 계엄이 해제된 뒤 퇴근을 했다는 게 김 의원의 설명이다. 홍 차장은 일련의 얘기를 시작할 때 “만화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소회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홍 차장과 함께 신 위원장의 면담에 참여한 조태용 국정원장의 주장은 전혀 달랐다.
조 원장은 면담 뒤 기자들과 만나 “이번 비상계엄과 관련해 대통령이 국정원장에게 정치인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전혀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한 언론이 ‘홍 차장이 윤 대통령의 체포 지시를 여겨 경질됐다’는 취지의 보도를 한 데 대해서도 조 원장은 “그런 일이 있었다고 보도가 났을 때 홍 차장에게 직접 ‘그런 지시를 받은 게 있냐’고 확인했는데 본인이 ‘오보’라고 했다”며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원장은 “국정원은 비상계엄 당시 정치인 체포에 어떤 행동이나 조치를 한 적이 없다”며 “비상계엄과 관련해 우리가 어떤 조치를 한 게 있으면 국정원장한테 지시하지, 원장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1차장과 친분이 없다”며 “저로서는 (대통령이 체포 지시를 했다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했다.
조 원장은 또 “국정원은 수사권도 없어서 체포에 관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나 인력도 없다”며 “전혀 사실이 아니고, 아무것도 안 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대통령실 역시 “대통령은 계속해서 ‘나는 체포를 지시한 적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4일 새벽 계엄군이 국회 본청으로 진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 차장의 경질 이유를 놓고도 두 사람의 주장은 엇갈렸다.
홍 차장은 “5일 16시경 국정원장으로부터 ‘대통령이 즉시 경질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사직서를 제출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인사기획관에게 제출했다”며 “6일 10시에 차장 이임식을 마쳤는데, 원장이 다시 불러서 ‘사직서를 반려하고 예전과 같이 근무했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설명했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반면 조 원장은 “(계엄 해제 뒤인) 4일 오후에 1차장이 ‘(북한 문제와 관련해) 안보가 중요한데, 초당적 단합이 중요하니 이재명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서 설명하는 게 어떠냐’고 얘기했다”며 “그건 정치적 중립에 어긋나므로 할 수 없고, 이 말 듣고 정치적 중립 면에서 1차장이 적절치 않다 생각해서 5일에 대통령에게 교체를 건의했다”고 밝혔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조 원장도 기자들에게 “1차장 교체와 관련해 대통령이나 대통령실의 누구로부터 ‘경질해라, 교체해라’ 얘기 들은 바가 전혀 없다”며 “오로지 제 판단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인사하게 됐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홍 차장은 중앙일보에 “비상계엄으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야당이 북한 불안 이슈를 제기해 생기는 국민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해 야당에게도 현 대북 동향이 안정적이라는 점을 브리핑 하는게 좋겠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표 반려와 관련해서도 홍 차장은 “입 막음용”, 조 원장은 “펜딩(pending·미결 상태)라고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