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공이 전자-컴퓨터쪽이다. 대학다닐 땐 밥먹고 나면 미분방정식 푸는 것이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고나서 시간여유가 생기면서 '나도 대학생인데..공학말고는 아는 게 없네? 대졸이면 그래도 교양이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전 안가보던 인문대학 도서관에 갔다.
공대생이 인문학에 대해서 뭘 알고 있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등학교 때 들었던 책들 중 언뜻 기억나는 것부터 찾아보았다.
그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근데 컴퓨터에다가 '국부론'이라고 검색하는 순간부터 이상했다. 아니..그렇게 유명한 책인데 제일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되어서 나온 책이
1992년에 나온 책이었다.
그나마 그 책도 내가 다니던 대학 도서관에는 없었다. 참고로 난 인서울 대학을 졸업했다. 명문대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없었다.
그래서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검색해봤더니 2007년에 서울대 김수행 교수가 한국어로 번역한 국부론이 있었다.
와..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른 대학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고, 2주후에 받아서 읽어볼 수 있었다.
이 때도 나는 전혀 몰랐었다. 서울대 김수행 교수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내가 희망도서로 신청한 국부론 번역본은 자유시장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가 번역했다는 것을.
자유시장이론의 기초가 되는 이 책을 한국의 인문학도들은 공산주의자가 책을 내놓을 때까지 아무도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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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내가 여러 학문 중에서 전자-컴퓨터쪽을 지원한 이유는 삼성전자가 소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소니를 앞지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항상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한국경제를 선도하였다. 특히 하이닉스의 연구원들은 다 망해가는 회사를 살리려고 집에도 안가고
24시간동안 회사안에 머물면서 일했다.
나는 이런 것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국부론같이 중요한 책이 공산주의자에게 번역되어 나오기 전에는 원서를 봐야만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인문학한다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때 나는 미국으로 갔어야했다. 한국의 인문학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이 때 깨달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파괴력이 있는 결함인지 빨리 깨우쳤어야 했다.
그래도 국부론은 공산주의자가 번역한 책이라도 있지..
국부론을 이은 경제학의 대작 중에서 데이비드 리카도가 쓴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라는 책이 있다. 경제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작이다.
지금이라도 교보문고, 알라딘, Yes24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이 책은 2024년인 지금까지도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없다.
참나. 기가 막혀서 진짜.
국부론에 필적할 정도로 경제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을..한국어로는 아예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거다.
검색해서 나오는 책들은 전부 이 책의 일부만 번역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역한 책은 없다.
완역을 한 적이 있긴 하다. 1991년에..비봉출판사에서 했었다. 그런데 이 책..구하기가 힘들다.
세상에..얼마나 인문학도들이 책을 안 읽었으면..'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같은 책조차 아무도 번역할 생각을 안할까?
얼마나 인문학 전문가들이 게으르면..국부론을 공산주의자가 번역할까?
이렇게 정신적 교양의 수준이 낮으니..어떻게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겠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아주 정교한 통찰을 하면서, 수백년동안 유럽인들이 얻은 경험까지 더해져서 만들어진 고차원적인
정치체제다.
이런 정치체제를 공산주의자가 국부론을 번역하는 나라에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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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일인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