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일요일이 가까워지면 긴장감이 높아지는 곳이 있다. 교회다. 정확히 말하면 예배를 하려고 많은 사람이 모인 교회와 그 주변이다. 코로나19로 방역 당국은 사람 간 감염 위험이 높아지는 주일예배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부 교회가 예배를 강행하면서 관과 교회, 교회와 지역주민이 갈등을 빚고 더 나아가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도 보인다. 이들 교회는 더 나아가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가로막는다는 견해를 내놓고도 있는데, 경제활동의 어려움과 물리적 거리 두기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예민해진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주일예배는 정말 어떤 상황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인가. 일시적 예배 금지는 정말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더 나아가 종교를 탄압하는 일일까.
■ 종교로부터 법이 독립한 세속주의
‘종교의 자유’라는 주제는 인류 역사 내내 심각한 다툼과 갈등의 원천이었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한 나라의 문화 및 전통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법과 종교의 분리 또는 종교로부터 법이 독립하는 역사적 여정은 그리스도교로 표방되는 서구 유럽의 세속주의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가 천부적 권리로 향유하는 세속주의 헌법으로 열매 맺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세속화, 세속주의’라고 하면 종교가 세상의 질서와 가치체계에 무분별하게 속화(俗化)하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세속주의’는 기나긴 역사적 투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개념으로, 유럽사에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유구한 긴장과 갈등관계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국교주의, 성직주의, 근본주의 개념과 더불어 그리스에서 유래한 유럽의 비판정신 가운데 하나이다.
영국 웨스트민스터시의 문장. ‘주여, 나라(도시)를 지켜주소서(Custodi Civitatem Domin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세속주의’는 영어로 ‘secularism’, 이탈리아어로 ‘세콜라리차치오네(secolarizzazione)’인데, 때로는 같은 현상을 프랑스어 ‘라이시테(laicite)’, 이탈리아어 ‘라이치타(laicita)’로 부르기도 한다. 이 차이는 세속주의를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한 데서 온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속세의 시민권력으로 넘어가는 현상으로 이해하여 ‘세속주의’라고 부른 반면, 일반 민중은 원래 민중에게 속한 것을 다시 가지고 온 것이라 여겨 ‘라이치스모(laicismo)’, 즉 ‘평민주의, 인민주의’라는 용어를 썼다.
세속주의 사상은 시민생활, 사회생활 및 정치의식에서 종교적인 이상과 윤리적인 가치를 부정하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정교분리’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교회가 관장했던 교육이나 빈민 구제 같은 방대한 사회정책을 포함해 많은 권리를 정치권력에 이양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는 구체적으로 로마가톨릭교회였지만 이것은 곧 그리스도교 전체로 확대된다.
■ 종교행사 제한에 관한 법적 근거
종교의 자유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본권으로 여기에서 헌법상의 다른 기본권이 파생하였다. 세속주의 헌법을 채택한 우리나라 헌법 제20조도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규정한다.더 나아가 종교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와 ‘신앙실현의 자유’로 나누는데,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로 신앙을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포기하는 자유를 말하고, 이에 더해 신앙을 갖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된다. 반면 신앙실현의 자유는 ‘상대적인 자유’로 종교의식, 종교선전, 종교교육 및 종교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말한다. 단, 종교의 상대적인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이나 사회공동체 질서와 조화로운 범위 안에서만 인정된다. 헌법 제34조 6항도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헌법 제37조 2항에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일반적으로 국제인권법상 종교적 신념을 표명할 권리는 ‘세계 인권선언’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유럽협약’ 모두 거의 비슷한 문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규정은 종교적 신념을 표명할 권리와 그러한 권리가 국가에 의해 어떻게 제한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상세 지침은 1981년 11월25일 유엔총회의 ‘종교차별철폐선언’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차별철폐선언 제6조는 제1조의 규정에 따라 종교적 신념의 다양한 표명형태를 주제별로 분석할 수 있는 규정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맥락을 따라 종교의 자유는 절대적이지만 종교행사의 자유는 상대적으로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 제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례도 있다. 칸트웰 대 코네티컷(Cantwell v. Connecticut) 판결에서 판사는 “수정헌법 개정 제1조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 조항은 ‘믿는 자유와 행동의 자유(freedom to believe and freedom to act)’라는 두 가지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전자는 절대적이지만 후자는 본질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 모름지기 행동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규제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고 말했다. 예배의 자유, 즉 종교행사의 권리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다룬 유럽의 헌법학 서적에서도 감염병의 상황에서는 국가권력에 의해 종교행사를 일시적으로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현재 상황에서 행정당국이 일시적으로 예배를 금지하여도 별다른 소동이 없다.
레바논 베이루트. 레바논 마로니타 교회와 이슬람 모스크의 첨탑이 경쟁이라도 하듯 높이 솟아있다.
■ 종교 자유에 관한 교회의 선언
서양사에서 교회와 국가 사이에 오랜 갈등이 교회에 더 큰 피해를 가져옴에 따라 로마가톨릭교회는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을 발표한다. “종교 자유의 원칙이 단지 입으로 선언되거나 법으로 정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의 있게 실천에 옮겨질 때, 비로소 교회는 신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독립을 위한 법률적, 실질적 조건을 안정적으로 얻게 된다. 이런 독립이야말로 교회가 사회에 강력히 요구했던 바이다”라고 천명하면서 여러 국가와 교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선언에서 교회의 독립이란 국가로부터의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독립이 아니라 단지 비합리적인 규제나 제한으로부터 ‘상대적’ 독립을 하겠단 의미로, 말을 바꾸면 공공질서를 위한 합당한 명분이 있는 국가권력의 규제는 따르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교회법 제1284조 제2항 제2호, 3호는 국가 법률과 조화를 이루고, 교회법 제1268조와 제1290조는 교회도 재산을 취득하고 유지, 관리, 양도할 때 일반 시민법을 교회법으로 준용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코로나19의 확산 예방을 위해 국가는 종교단체에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행정명령을 집행하여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권고로써 해결하지 못해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일시적인 불가피한 최소한의 조치임을 교회 측에서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아울러 종교인들의 신앙을 건드리는 불가피한 조치인 만큼 국가도 늘 최대한의 감수성을 갖고 자신의 조치를 돌아봐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상대적 자유’인 종교행사를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제한하는 것은 본질적이고 절대적 자유인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부모의 종교적 신념이 수혈에 반대하는 입장일지라도, 미성년자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수혈하는 것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 종교백화점과 배타주의
오늘날 우리는 다문화사회의 한 요소인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백화점’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각 종교가 이웃을 배려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현실은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보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참되고 옳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배타주의를 더 많이 목격하게 된다. 극단적인 종교 배타주의는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을 죄악시하거나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폄하한다. 더 나아가 다른 종교적 신념을 나타내는 그림이나 조각물들을 파괴하거나 모독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종교적으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이나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극도의 종교적 피로감과 함께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더욱이 개인 차원을 넘어서 요즘과 같이 감염병이 위중한 상황에서 교회에 모여 예배하기를 고집하면서 드러나는 종교적 반감은 생각보다 종교가 사회에서 역기능으로 작용할 우려가 높다. 자신이 믿는 신념이나 종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문화, 다인종, 다종교 사회에서 사회통합의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코로나19가 우리 지역사회에 폭증했던 지난 3월은 그리스도교 전례력으로 사순시기 혹은 고난시기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까지 수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던 시간을 기리며, 교회는 예수의 죽음에 담긴 뜻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올해는 사랑해야 할 이웃과 거리를 두는 것이 최상급의 이웃사랑이 되어버린 이 역설 속에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태 12, 7)”라는 말의 의미를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른 척하지 않기 바란다. 이제 실천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웃을 불안과 위험으로 몰아넣으며 예배를 강행하는 현재 상황이 종교적 가르침을 따른다기보다 종교단체의 집단적 이익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면 종교의 자유에도 책임이 따른다.
스페인 코르도바. 과거 이슬람 사원이 현재는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종교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일상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가 일요일 하루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기호식품’처럼 취하며 익숙한 전례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하루라도 ‘우리 종교’ ‘우리 교회’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을 버리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실천하려 한다면 한발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리지 않고 기도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이런 감염병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동의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런 신을 믿고 싶지 않다.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