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골목에서 한 중년 남성이 생필품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뉴스1
67세 김상민 씨는 대형 건설회사에서 20여년 근무하다 퇴직했다. 여러 차례 사업에 손댔지만, 번번이 쓴맛을 봤다. 빚더미에 앉으며 가정이 흔들렸다. 이혼하면서 아내·딸과 연락이 끊겼다. 5년 전 서울 신림동 원룸 생활을 시작했다. 이번엔 건강이 망가졌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노동 일도 못 하게 됐다. 자선단체에서 도시락을 받으며 하루하루 버틴다.
바깥 활동은 '사치'다. 친한 친구를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친한 이웃한테 사기를 당하면서 새로 사람을 사귀기가 꺼려진다. 친구의 문자·전화가 와도 피한다. 외부와 담을 쌓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는 기자와 통화에서 "며칠 만에 입을 뗀다"며 "죽지 못해 산다"고 했다.
김씨 같은 4060 중장년 남성들이 대표적인 관계빈곤 고위험군이다. 적지 않은 중장년 남성들이 실직·은퇴·사업실패→이혼→관계단절이라는 '고립 공식'으로 치닫고 있다. 이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주변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다. 힘든 상황인데도 어디에도 도움을 잘 요청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들을 고립·은둔에 취약한 '신(新) 복지 사각지대'라고 평가한다.
중앙일보 취재팀이 4060 남성, 복지 공무원, 정부 보고서 사례자 등 20명을 분석(9명은 인터뷰)했더니 이런 경향이 뚜렷했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10월 발간한 '사회관계와 외로움' 보고서의 분석과 일치한다. 50대 이상, 1인 가구, 실직 상태인 남성이 고립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OECD는 "중년 남성은 직장 중심의 관계망에 의존하고 동네 친구나 가족은 약하다. 실직·은퇴 후 위축되면 관계망이 끊어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한다.
국가데이터처의 사회조사(2025년)에서도 4060 남성의 관계망 부족을 알 수 있다. 남성 중에서 가족·친척 외 교류자가 없는 비율이 60세 이상은 29.6%, 50대 27%, 40대 26.7%이다. 10~30대(16.5~22.4%)보다 꽤 높다. 또 여성(40대 20.6%, 50대 19.3%, 60세 이상 27.6%)보다 높다. 사별·이혼 가구도 4060 남성의 비율이 72.3%(가구주 기준)로 여성(53%)보다 높다.
한상필 한국사회보장정보원 사회보장정보연구소장은 "중장년 남성은 같은 세대 여성과 비교해 공동체에 의지하려 하지 않고, 고립되기 쉬운 특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굴 만나도 서열을 따지는 성향이 강한데다, 인생 성패가 이미 결정된 시기라 재기가 어렵다는 압박감이 심한 점도 고립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이들은 '원래 무슨 일 하셨나' 식으로 사회적 계층·신분을 먼저 따지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데이터처 사회조사(2025)에 따르면 '낙심하거나 우울할 때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응답 비율이 50대 남성 26%, 60세 이상 남성 31.3%, 65세 이상 남성 32.8%로 나이 들수록 심하다.
정상 가정의 은퇴 남성도 관계빈곤에서 헤어나기 어려워한다. 공공기관 은퇴자 박용호(가명·61·4인 가구)씨는 하루 1시간 집 주변 산책 외엔 외부 활동을 안 한다. 그는 "도서관·학원 등에 가서 낯선 사람을 만났더니 툭 하면 말을 놓고 이것저것 따져 물어서 불편하더라"고 말한다.
중년 남성은 고독사 고위험군이다. 고독사 첫 발견(신고)자는 임대인·경비원·건물관리자·택배기사가 많다. 가족·이웃은 상대적으로 적다. 지자체 공무원은 "고립·관계단절이라는 그간 접하지 못한 새로운 사각지대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 산업체를 운영하던 A씨는 회사가 망한 뒤 부인과 헤어졌다. 이후 관계빈곤의 굴 속에 들어갔다. 술을 마시고 주민센터에서 난동을 부렸고, 법인택시 운전을 권해도 본인이 알코올 중독이라며 거부했다. 그러다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에겐 지역사회 등의 꾸준한 관심과 지원이 필수적이다. 부산에 사는 김모(63)씨는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남 부럽지 않은 대기업 직원이었다. 하지만 명예퇴직·이혼 등을 잇달아 겪으면서 1인 기초수급자가 됐다. 자책감 등으로 사회적 관계도 모두 끊겼다. 7년 전 뇌경색 고비를 맞았다.
서울의 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일자리 정보를 살펴보는 중년 남성 구직자의 모습. 뉴스1
하지만 지역 사회복지관의 영상 촬영·편집 프로그램, 목공·요리 교실에 참여하면서 관계빈곤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청년 발달장애인을 돕는 멘토 활동에 나선다. 김씨는 "나처럼 고립된 1인 가구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사람이 없다. 누군가 관심을 주고, 집 밖으로 나오게 하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은정 부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중장년 남성 1인 가구는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 역량이 취약해 일자리가 없으면 바로 고립 단계로 떨어질 수 있다. 어떻게든 일과 연계된 프로그램 중심으로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장년 남성뿐 아니라 고령 여성, 2030 청년 등 연령·성별에 맞춰 세분화한 정책이 필요하다. 통장으로 대표되는 지역 주민과 지자체의 협업으로 이들 가구를 계속 설득하고 사회적 관계망을 만드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이에스더·정종훈·채혜선·남수현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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