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가야 할 칼이 왼쪽에"…피로누적 의대 교수들 "두렵다"

2024-03-23 08:50:05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의·정 갈등으로 인해 의료 공백이 길어지는 가운데 22일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복도를 걷고 있다. 2024.3.22/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전공의와 전임의가 떠난 자리를 메우고 있는 교수들의 피로 누적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 외래 진료는 물론 응급실, 입원 환자 돌보기에 당직까지 서면서 체력의 한계에 다달아 환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부는 비상진료체계 가동과 군의관·공보의 추가 파견, 시니어 의사 신규 채용 등의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현장에선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23일 의료계에 따르면 전공의들이 본격적인 이탈을 시작한 지 한달을 넘어서면서 그들의 빈자리로 인한 의료공백을 메우던 교수들의 신음이 더욱 커지고 있다.

빅5 병원의 한 교수는 "교수들이 워커홀릭으로 살아 오래 일하는 게 익숙하다고 해도 지금 같은 스케줄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며 "다들 40~50대 나이에 하루 밤 새는 것도 힘든데 몇 주간 일주일에 몇 번을 당직을 서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너무 힘들다"고 한숨을 내뱉었다.

21일 열린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브리핑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토로가 이어졌다.

조윤정 전의교협 비대위 홍보위원장은 "(전공의들이 이탈한 지) 5주째 들어서면서 교수나 이런 분들이 사직서 내기 전에 순직할 판"이라며 "지난 5주간에 뿌려진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 때문에 심리적 압박을 받고 우울하고 불안해하고 무력감하고 밤잠도 못 잔다. 당직을 서야 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생명을 다루는 교수들의 번아웃은 환자 치료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필수의료과 교수는 "원래부터 사람이 없고 힘든 과여서 그나마 잘 이겨내고 있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멍하게 되고 이대로 가다간 우리도 환자도 다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조윤정 위원장도 "일주일에 어떤 분은 세 번 당직을 서면서 밤을 새우고 그다음 날 아침에 또 나온다. 이렇게 피로감이 누적되면 의도하지 않아도 결국 환자가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에 처해진다"며 "머리가 핑 돌고 정상적인 진료가 불가능하다. 왼쪽 수술하러 들어갔는데 오른쪽 수술하려고 칼이 가고 있는 상황이 초래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이에 교수들은 사직서 제출 결의를 떠나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 오는 25일부터 주 52시간 이내에서 외래·수술·입원 진료를 유지하기로 했다. 다음달 1일부터는 외래 진료를 최소화 해 수술·응급진료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2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사후 브리핑을 하기 앞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2024.3.21/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정부도 나름의 대책을 내놓고 있다. 비상진료체계 강화를 위해 25일부터 약 60개 의료기관에 군의관 100명과 공중보건의사 100명 등 총 200명을 추가 파견한다. 앞서 투입한 213명까지 합치면 총 413명이다.

또한 필수의료 분야 진료 공백 최소화를 위해 시니어 의사 활용 지원방안도 논의됐다. 정부는 의료기관이 시니어 의사를 신규 채용하고, 퇴직예정 의사의 경우 채용을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의 대응책에 현장 의료진 반응은 냉랭하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병원마다 시스템이 다르다 보니 수련 받았던 병원 체계와 차이가 크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심지어 같은 의료원이어도 분원끼리 처방 전자 시스템이 다른데 트레이닝만 적어도 열흘은 걸릴 것"이라며 "게다가 빠진 전공의만 1만 명인데 413명을 투입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의 긴급한 대책이 현장에 도움이 됐다면 교수들이 사직이 아니라 순직하겠다며 울부짖느냐"면서 "정말 환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도 이런 한심스러운 대책을 늘어놓을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에 더해 개원의가 수련병원에서도 진료를 볼 수 있도록 하고, 현재 병원 내에서만 사용 가능한 전자의무기록(EMR)을 병원 밖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의료계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방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개원의는 "지금 전공의가 없어서 문제인 건데 개원의가 종합병원에 가면 무슨 일을 하겠나. 전공의 일하라는것 아니냐"라며 "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재택근무하다 환자가 안 좋아지면 의사가 책임질 게 뻔한데 말도 안 되는 대책"이라고 비판했다.

지방의 한 필수의료과 교수는 "지금 상급종합병원이 무너지면서 2차병원 등 개원가가 미어터지고 있는데 대체 누구를 데리고 와서 일을 시키겠다는 건지, 어떤 일을 시키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개원가에서도 필수의료를 하는 의사는 부족하고, 이들을 오게 해서 암 수술을 하고 고위험 환자를 치료하게 하겠다는 게 말이 되나. 아무 의미 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환자들도 상황이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부와 의료계에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들에게 죄송하다고 하지만 결국 의료계는 의료 현장을 떠난다는 협박만 하고 정부는 원칙만 내세우며 강압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게 문제"라며 "이들의 치킨게임에 결국 환자들만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고 있고 헌신짝처럼 버려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환자들은 이런 시국에도 실효적인 대책을 준비하지 않는 국가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정부는 의료계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국가의 책무를 망각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가 환자를 볼모잡는 것은 의료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젠 정부와 의료계, 환자들이 자리를 마련해 이야기를 하고 실질적인 해법에 대해 모색해 나가야 할 때"라고 했다.

sssunhu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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