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관 ㅡㅡㅡ
독재관(獨裁官, 라틴어: dictator 딕타토르[*])은ㅡㅡ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있었던 관직의 하나다.
로마 건국 초기부터 있었던 직책이나 상설직이 아닌 임시직이었다. 외적의 침략 등 비상시, 국론 일치를 위해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어 극복토록 하였다. 임기는 6개월이었으며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이 임명하였다. 기원전 202년 포에니 전쟁 당시를 마지막으로 아무도 독재관에 취임하지 않았으나, 기원전 82년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는 비상사태를 이유로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공화국 복구 개혁을 마친 술라는 독재관을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ㅡㅡㅡ 기존의 독재관과 달리 임기가 무제한인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였다. 카이사르는 이 직책에 취임 후 이 직책을 통해 그가 왕이 되려 한다고 주장한 공화파에 암살당하였다
독재관은 부관 1명을 둘 수 있는데 로마 초기에는 주로 기병대 지휘를 이 부관에게 맡겼기 때문에 기병장관(Magister equitum)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독재관이 지명하는 자가 기병장관이 되었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중에는 원로원이 독재관과 기병장관을 함께 지명하였다. 한국, 일본에서는 기병장관이 단순 기병대 지휘관보다 격이 높은 실질적인 부독재관이라는 점에서 중국 한나라의 사마 용어를 빌려 '사마관'이라고 번역한 책도 있다.
대체로 전직 집정관이 독재관에 지명되었지만, 집정관을 맡지 않은 이가 독재관을 맡는 일도 가끔 있었다. 기원전 4세기의 인물인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는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전장에서 켈트 전사와 결투를 벌인 끝에 처단해 대단한 인기를 누린 덕분에, 기원전 353년 집정관을 경험하지 않은 채 독재관에 선임되어 펠리스키족과 전쟁을 치렀다. 이후 기원전 348년에도 집정관을 맡지 않은 상황에서 독재관에 선임된 뒤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했다. 그는 기원전 347년에 비로소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독재관, 집정관, 감찰관 등 고위 행정관들의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독재관이 선임된 다양한 이유가 명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상황들은 서로 결합될 수 있었다. 가령, 독재관은 폭동을 진압하고 외적과의 전쟁을 치를 수 있었으며, 독재관이 외적을 물리치고 돌아와서 종교 축제를 개최하거나 못질 의식을 거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임무만 수행했으며, 독재관이 할당받지 않은 일에 끼어들었다가 비난받은 일도 종종 있었다. 루키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는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독재관에 선임되었지만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평민들을 징집해 호민관들의 반발을 샀다. 급기야 호민관 마르쿠스 폼포니우스는 만리우스가 독재관에서 물러난 이듬해에 아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를 학대한 혐의로 고발해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했다. 다만 토르콰투스가 폼포니우스에게 학대에 관한 추가 정보를 주는 척하며 접근했다가 단검으로 위협해 고발을 취소시켰다.
4. 독재관의 위상과 권력[편집]
독재관은 특정 문제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았기에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독재관은 당연히 집정관, 법무관, 감찰관처럼 원로원 회의에 참석할 때 셀라 큐루일스(sella curulis: 두 쌍의 청동 다리가 받치는 접이식 의자)에 앉을 수 있었고, 보라색 줄무니가 있는 토가인 '토가 프라이텍타(Toga Praetexta)'를 착용할 수 있었다. 또한 집정관이 릭토르를 항시 12명 거느린 데 비해, 독재관은 로마 바깥에서는 24명, 로마 내에서는 12명 거느렸으며, 집정관이 거느리는 릭토르들은 도끼 날을 달지 않은 파스케스를 들고 다니는 데 비해 독재관의 릭토르들은 도끼 날을 달은 파스케스를 들고 다녔다. 이는 독재관들이 삶과 죽음까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으며 집정관들보다 특별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독재관은 그 성격상 로마의 포메리움 내에서 정무를 볼때도 원정을 나간 군사령관으로서 작전에 임하는것과 같다는 것을 즉, 로마의 비상사태임을 로마시민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포메리움 경내에서의 군사행동을 결코 허용치 않는 로마의 통념상 이 독재관의 활동은 임시적임을 일깨우기도 했다.
하지만 독재관이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수는 없었다. 명확한 한계가 정해진 적은 없지만, 집정관, 법무관 등 고위 행정관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었으며, 원로원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호민관이 독재관의 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고발할 수 있었다. 리비우스는 독재관이 실시한 선거를 거부하겠다고 위협한 호민관들의 사례들을 저서에 싣기도 했다. 게다가 독재관이 퇴임한 후 재직할 때 실시한 정책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독재관들이 섣불리 행동하기 힘들었다.
독재관은 일반적으로 한 번에 한 명뿐이었지만, 독재관이 사임한 후 새로운 독재관이 지명될 수도 있었다. 또한 독재관이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간주될 경우 직위를 사임하도록 강요받을 수 있었으며, 신탁에 따라 독재관이 물러나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 가령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는 기원전 333년 삼니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독재관에 선임되었지만, 선임 과정에서 종교 의식에 결함이 있었다는 이유로 사임해야 했다.[3]
설령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재관에 뽑히더라도 원로원과 민회가 부당한 선임이라고 간주하여 취소될 수 있었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진행중이던 기원전 249년 집정관에 선임된 뒤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참패한 뒤 로마로 소환되었다. 당시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역시 카마리나 인근에서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막대한 함대를 잃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여기고 풀케르에게 독재관을 지명하라고 명령했다. 풀케르는 자신의 전령이자 해방노예의 아들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글리키아를 독재관으로 지명했고, 글리키아는 풀케르를 독재관으로 추대한 뒤 기병장관을 맡기로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무효로 처리했고, 시민들은 "경솔하고 무모하게 처신하여 참패를 초래한 주제에 참으로 뻔뻔하고 옹졸하다"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결국 풀케르는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받을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
이렇듯 현실적인 제약이 많이 따랐기 때문에, 독재관들은 자기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한 뒤 곧바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파트리키 신분으로 본래 로마 정계에서 활약했으나,[4] 장남 카이소가 호민관을 구타한 후 에트루리아로 망명한 사건으로 인해[5][6] 아들을 대신해 막대한 벌금을 지불한 후 티베르 강 오른쪽 둑에 4에이커 가량의 농지를 구입한 뒤 그곳으로 내려가서 농사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주변 부족들과 전투가 벌어지자 원로원은 킨킨나투스의 농장에 그를 모시러 갔고, 그는 선선히 따라나서 독재관으로 취임해 16일만에 적을 무찌르고 독재관을 사임했다. 로마에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자 다시 독재관에 취임해서 이번엔 20여일만에 국난을 해결하고 독재관을 사임한 뒤 노구를 이끌고[7]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농사에 열중했다. 그의 사례는 공공에 대한 봉사, 애국, 겸손, 절대권력을 내려놓은 공화주의의 이상을 나타내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져 여러 장소에 킨킨나투스를 기리는 이름이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시내티의 이름이 킨킨나투스에게서 유래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5. 쇠락과 소멸[편집]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의 영향력이 지중해 전역에 확산된 후, 로마군이 치른 모든 전쟁은 집정관 및 법무관에 의해 수행되었지만 독재관은 그러지 못했다. 독재관은 두 행정관보다 임기가 짧았기 때문에, 1년 내지 수년간 외지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로마가 확보한 해외 영토가 속주로 개편되고 총독들이 그 곳의 통치를 행사하고 군대를 독자적으로 이끌게 되면서, 집정관들이 로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에 독재관이 선출될 이유가 없어졌다. 이후 소규모 외적은 총독들이 맡아서 처리했고,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을 때 집정관 한 명이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출진하고 다른 한 명은 로마에 남아서 내정을 담당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추종자들을 선동해 왕이 되려 한다고 확신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등 원로원 의원들은 집정관 로마에 있던 유일한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에게 독재관을 선출하거나 그라쿠스를 직접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스카이볼라는 그라쿠스를 처단하길 거부하고 독재관 선임 역시 거절했다. 이에 나시카 등은 몽둥이를 들고 그라쿠스 일당을 공격해 때려죽였다. 그 후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 일당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은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반포해 집정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에게 전권을 맡겨 그라쿠스 추종자들을 처단하게 했다. 이렇듯 기원전 2세기에는 비상시국에도 독재관은 선출되지 않고 집정관에게 문제를 해결할 전권을 주는 것으로 해결했다.
역병 등 재난이 닥쳤을 때 신들을 달래기 위해 종교 의식을 거행할 목적으로 선출되는 독재관 역시 대체되었다.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그 의식을 주관했고, 폰티펙스 막시무스, 플라멘 등 사제들이 의식을 수행했으며,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관료들이 특정 사건과 관련된 문구를 찾아내어 원로원에 보고하고 원로원이 이에 따른 조치를 취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듯 독재관이 나설 일이 없어지다 보니, 독재관은 오랜 세월 종적을 감췄다.
그러다가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의 최종 승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임기 제한을 없앤 독재관으로 취임했다. 정확히는 "법을 만들고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Dictator Legibus Faciendis Et Rei Publicae Constituendae)". 단, 여기에는 공화국 재건을 마치고 비상시가 끝나면 독재관직에서 물러난다는 조건이 있다. 즉, 비상시라는 명분으로 계속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비록 술라가 자진해서 단 2년만에 독재관에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술라 본인이 군사 쿠데타 이후 독재관이 되는 선례를 만들어 버렸고, 이때 너무 잔혹하고 로마의 전통과 상식을 뛰어넘는 독재를 하는 통에 본인의 의도야 어찌됐든 로마의 합법적인 관직인 독재관을 황제 비스무리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그의 통치는 그가 공화국의 적이라 판단한 사람들을 숙청하고, 선거를 통해서만 오를 수 있는 관직들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동맹 도시의 땅을 빼앗아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의 퇴역 보상금으로 주는 등 지나치게 과격했다. 이로 인해 민중파 인사들은 물론, 술라파로 분류됐던 사람들까지 반란을 각지에서 일으켰으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등 술라파 인사들은 나중에 술라가 했던 개혁들을 대부분 폐기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내전을 단행한 뒤 기원전 46년 임기 10년짜리에 이어 기원전 44년 임기 무제한의 종신독재관에 취임했다. 그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독재관의 권한으로 개혁을 단행했으며, 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할 준비에 착수했다. 카이사르 역시 술라처럼 은퇴할 수 있었지만, 독재관 스스로 원해야 물러난다는 점은 독재관이 독재정치로 변질될 우려가 있음이 명백해진 것이며 이를 카이사르에 대입해 보면 카이사르가 독재관에서 물러날지 말지는 카이사르에게 달렸고 결국 그를 강제로 끌어낼 방법은 무력 외엔 없었다. 카이사르가 독재관으로 지낸 기간도 반대파에게는 명분거리로 그 술라도 2년만 지내고 내려왔는데 카이사르는 암살 당시 4년 5개월째 재임하고 있었다. 반대파 입장에선 카이사르가 얼마나 재임할 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카이사르의 정적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카이사르 암살 사건 후,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을 달래기 위해 "독재를 영원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술라와 카이사르가 맡았던 종신 독재관은 로마법에서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지중해 세계 제일의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독재관을 맡았다가 공화정을 여전히 추구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극심한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이를 맡기를 꺼렸다. 기원전 22년 원로원 사절단이 독재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 직위가 증오만을 가져올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확고히 다졌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임페라토르, 또는 프린켑스로 칭해진 로마 황제는 집정관 권한, 전직 집정관 권한, 호민관 특권, 감찰관 특권을 비롯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모든 핵심 권한을 합법적으로 장악했고, 이를 개인재산으로 인정받아 원로원 추인 아래 후계자에게 물려줬다. 학자들은 기원전 29년 이후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의 프린켑스의 권한은 독재관보다 훨씬 강력했다고 평한다. 프린켑스는 여러 특권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제사장 자리도 가지고 있었고, 이탈리아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권과 제국 전역의 로마군 지휘권도 소유했다.
여기에 더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개정해 ㅡㅡㅡ온갖 죄(불경한 죄까지도)를 반역죄라는 이름으로 재판 없이 날려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ㅡㅡ 모두 합법적으로 정적을 제거할 수 있었다. 원로원 의원, 집정관, 총독이 황제의 눈에 거슬려 반역죄로 처단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고, 평소 사이 나쁜 귀부인이나 공주와 엮어 불륜죄로 처벌도 가능했다. 사실 법률상으로는 황제가 가지는 임페리움은 독재관과 집정관보다 아래였다.[8] 황제위 자체에 집정관 권한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정관에 황제 본인이나 황제의 측근이 앉았고, 설령 집정관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려 해도 호민관 권한으로 제지가 가능했다. 이렇듯 아우구스투스 이래 황제들이 우회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독재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