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일본에 대한제국을 바쳤나?? 실질적으로 누가 매국노 인가??
" 군인 한 명 안 움직이고, 피 한방울 안 흘리고 병합 성공"
ㅡ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측근 고마쓰 미도리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호소문 중에서.. 고종정권에 대해 잔인한 학정과 부패를 언급하고 있다.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고 믿었다." ㅡ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호소문 중 일부,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이 식민지로 하려는 만행을 전세계에 폭로하기 위한 연설문 중 일부 : 조선말기와 대한제국 당시의 조선의 실정을 드러냄.
한일합병 전에 이완용 총리대신의 비서겸 일본어 통역관이였던 이인직에게 고마쓰 미도리가 한일합병 교섭 과정에서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병합하면서 왕을 멀리 떨어진 섬으로 추방했고, 미국은 하와이를 병합한 후 국왕 신분을 시민으로 격하했던 사례 등 구미의 식민지 정책들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수용하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파격적인 예우를 약속했다.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 - 경술국치
당초 합병 조약은 1910년 8월22일에 체결되고 8월25일에 공표하기로 양국간에 합의 되어 있었지만, 대한제국 측에서 공표 날짜를 8월 29일로 연기할 것을 요청해서 29일에 공표된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순종) 즉위 4주년 기념회를 한 뒤 공표하기를 요청해서 일본이 그렇게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 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예에 따라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 국에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을 멸망시킨 자는 조선이지, 일본이 아니다" ㅡ 중국의 지식인 양계초
"다른 나라처럼 병력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거나, 의회에서 독단적 결정을 통한 강행이 아니라, 군주의 임의적 판단에 의한 평화적 합병이였음이 특기할 만한 일" ㅡ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병합의 저자 이데 마사이치
한일병합조약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 및 후예를 각기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위엄 및 명예를 황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조한다.
일본이 조선 왕공족 예우를 위해 제공한 세비
1911년 ~ 1920년까지 매년 150만엔 제공
1921년부터는 매년 180만엔 제공
1911년 ~ 1913년 총독부의 조선통치 예산은 연간 5,047만엔이였다는 점에서 보면 조선 총독부 예산의 적게는 대략 2%내지 3%가 매년 조선의 왕공족들에 지출되었다.
1930년 이왕가 재산 규모는 유가증권 60만7778엔, 부동산 772만6091엔
이왕직이 관리한 전답은 1억5천만평으로 한반도 전체 논 면적의 5%에 해당
일본의 황족들도 조선의 왕공족들의 재산을 아주 부러워했다고 한다.
한일병합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친족 및 각료 등을 예우하기 위해 조선 귀족제가 창설되고,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76명이 작위가 주어지면서 귀족에 임명되었고, 그러나 이 중 8명이 반납 혹은 자결 등으로 임명된 작위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작위와 함께 은사금이 주어졌는데, 최고액의 은사금은 흥선대원군의 장남(고종의 친형) 이재면이 83만엔을 받았고, 그의 아들 이준용 또한 16만3000엔을 받았다. 후작을 받은 윤택영은 50만4000천엔을 받아 두번째로 많은 은사금을 받았다. 그 다음이 후작을 받은 박영효로 28만엔이였다. 이완용은 백작과 함께 15만엔을 받았다.
그리고 추가로 은사공채 3천만엔(1,500만달러)를 조성해서 한국에 기부하고 그 은사금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금맥은 미국이 필리핀에 대한 권리 양도를 받기 위해 스페인에 지불한 2,000만달러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금액이였다.
한일병합에 협조한 대한제국 관리 3,683명
나이든 양반 유생 3,150명
모범이 되는 효자 · 절부 3,290명
빈궁한 홀아비 · 과부 · 고아 · 독신 등 7만902명
그리고 남은 은사금은 실업자와 빈곤자 구제와 교육 및 흉년에 대비 자금으로 분배하였다. 그리고 또 지세(地稅)도 대대적으로 감면했다.
"상민들은 양반과 관리들에게 생명 · 재산 등 모든 자유를 박탈당해 왔는데, 병합으로 법률상 · 사회상 양반과 동등한 인격자가 되었기에 그 기쁨이 평범하지 않았다"
ㅡ 한국인들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이데 마사이치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ㅡ 러시아 공사 이범진 자결 전 남긴 글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일에 발표된 순종 황제의 조칙
너희들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들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 조건을 깊이 살펴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도록 하라.
오늘의 조치는 너희들 민중을 잊어서가 아니라 민중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관리와 백성들은 나의 뜻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과 광복
1947년 5월17일 일본국 신헌법 공표 - 조선의 왕공족제도 폐지(이씨왕조 몰락)
18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이승만, 왕공족들의 모든 자산을 몰수 - 실질적으로 이씨왕조 무너짐)
*** 김용삼, 박종인 등의 저서들을 참고로 요약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