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락이 무서운 것은, 하강하는 속도와 각도에 상관없이 손 쓸 틈 없이 부지불식간에 찾아 오는 데 있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의 양자선택을 물어오는 면식범의 얼굴로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어제 미장은 옵션 만기일이었다. 파생으로 한껏 조져댄 전형적인 왝더독 시장. 횡경막을 갈라 들어오는 메쟈들의 칼질이 꽤 깊었다. 중동리스크, 금리인하, 강달러, 유가 등 안팎으로 소란만 가득하니 그려려니 여길 일이지만, 잊을만하면 한 판 땡기는 뒷다마의 노련한 칼질은 언제 맞아도 늘 아프다. 시장에서 이력이 미천한 HBM 캔들은 처절히 홀로 피어난 한 떨기 양귀비와 같다. 줄기도 없이 가파르고 위태하게 핀 표면장력의 꽃. 월담한 사랑처럼 뜨겁고 짧은 불륜의 종말일까. 파생의 칼질은 신데렐라 HBM 섹터에 집중됐다. 최근 3주간 미국 파생시장에서 하방베팅 계약물량 증가세가 폭발적이었다. 안팎으로 켜켜히 쌓인 악재로 그럴만 했다지만 실재 뻔한 방향으로 무대뽀로 처 미는 건 드물다. 제아무리 시대적 낭중지추 HBM이라 한들 낮은 평단을 빌미로 밀겠다는데 도리가 없다. 콜이냐 풋이냐. 단기이면서 만기를 가지고 있는 파생시장. 대박이냐 휴지냐의 팜므파탈의 쩐질이 전부다. 업황이고 나발이고 오직 돈놓고 돈먹는 싸움판. 칼질이 난무하다 어느 한 쪽이 죽어야 끝난다. 옵션 만기일인 오늘 새벽 미국시장은 죽이고 죽는 메쟈들의 전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데렐라 HBM 섹터는 다만 역사가 짧다는 이유로 만만하게 평가절하되며 유독 피를 많이 흘렸다. 이 가격이 맞느냐는데 근거가 허황되다는 이유. 시장이 어디 쉬운 적 있었던가. 본질적으로 이 바닥엔 평화란 없다. 작금의 시장이 어려운 건 우리 모두 안다. 그러나 절망의 꽉찬 음봉에서조차 희망의 아랫 꼬리는 있다. 이 바닥 오랜 격언이 있다. ‘옵션 만기일에는 주가를 논하지 말라’ 파생일에 주가 갑론을박처럼 어리석은 건 없다. 선혈이 낭자했던 미 파생시장은 지나갔다. 포연이 자욱했던 이슬람 정신승리에 처 맞고 파생으로 또 처 맞은 불면의 주말. 저 우연과 필연의 쌍 악재에 저당잡힌 불면의 주말은 끽해야 이틀이다. 그것의 수명은 오늘 내일 빠르게 휘발될 것이고 월요일엔 언제 그랬냐는듯 청명해 질 것이니. 그러니 세상이 끝난 것처럼 말하지 말자.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 바닥도 미래가 없는 사랑과 닮아 있다. 그래서 더 숨막히고 그래서 더 비장한 결말. 그것은 이 바닥에 있는 한 숙명같은 것. 그러니 노심초사 애끓음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