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한 나라의 지도자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는 시대도 드물것 같다. 오늘은 모택동과 참새사건을 새겨 보자.
중국 공산당 설립자 모택동이 1955년 농촌에 현지지도를 나갔다가, 지나가던 참새를 보고는 검지로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교시한다.
"저 새는 참 해로운 새다."
식량이 부족한 현실에서 참새가 그 귀중한 곡식을 쪼아 먹는다고 한마디 한 것이 인류사에 거대한 비극을 불러온다.
이때부터 신문, 라디오는 물론, 거리의 확성기까지 동원해 인민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참새와의 결전이 불가피함을 반복해 설명했다.
“참새는 쥐.파리.모기와 함께 4대 유해 생물의 하나이다. 참새 한 마디리가 한 해 일곱 근(3.5kg)의 곡식을 먹어치운다. 5천만 참새들이 해마다 3백만 인민이 먹을 양식을 훔쳐 먹는다. 5천만 참새를 박멸하면, 3백만 인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참새는 인민의 공적이다! 모든 참새를 잡아 죽여라!”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참새박멸이야말로 자연을 정복하는 인류의 역사적 투쟁이라 칭송했다. 문단지에는 “수천 년 죄악만 저질러온 것들아, 이제 너희들을 모두 숙청하노라!” 라는 사설까지 게재 되었다.
수많은 참새들은 결국 모택동이 주도하는 중국 자력갱생 운동인 대약진운동의 광풍과 함께 조직적으로 소탕되었다.
중국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1958년 11월에 이르기까지 약 4년간 중국 전역에서 대략 19.6억 마리의 참새가 박멸되었다.
날래고 약삭빠른 참새를 잡기 위해 중국의 인민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독을 풀고, 덫을 놓고, 총을 쏘고, 그물을 치고, 미끼를 뿌리고,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뜨리고, 나뭇가지에는 풀칠을 했다. 집집마다 방울 달린 허수아비를 세우고 줄을 당겨 새떼를 쫓았다. 그 모든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중국대륙 전역에 흩어진 참새들을 죄다 박멸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때, 중국 정부는 과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해 참새잡는 묘수를 설파한다. 참새들은 두 시간 정도 연속해서 날게 되면 힘이 빠져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다고 하고, 그때 쉽게 참새들을 잡을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정부가 찾아낸 참새박멸의 묘수를 따라 사람들은 저마다 징과 양철을 두들기며 난폭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나뭇가지, 전깃줄, 지붕 위, 처마 끝, 창문틀에 놓인 참새들을 향해 징과 양철을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징소리와 함성에 화들짝 놀란 참새들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면 긴 막대를 손에 쥔 학생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절대로 내려앉아 쉬지 못하게 그들을 쫓아버렸다. 실제로 소리에 놀란 참새는 하늘을 떠돌다 결국은 지쳐서 추락사했다.
이렇게 참새들을 조직적으로 박멸한 결과, 중국은 과연 어떤 댓가를 치러야만 했을까?
참새가 곡물을 먹는다는 것을 곡물만 먹는다고 성급하게 맹신한 것이 문제였다. 1958년말까지 참새가 20억 마리 가까이 학살되며 사실상 중국 내륙에서 참새의 씨가 마른 1959년, 농사가 흥할 거라는 정부와 농민들의 기대와 달리 메뚜기를 위시한 참새에게 피식당하던 해충들의 개체수가 조절되지 못해 해충이 막대한 규모로 발생했다.
이러한 원인 등으로 중국사에 길이 남을 대흉작이 벌어졌고, 공식 발표 2,000만 명, 학계 추산 최소 3,000만 이상, 최대 4,500~6,000만 명의 기록적인 아사자가 발생했다.
(아사자수 규모가 1960년대 대한민국의 인구수 약 3,000만명의 두배 가까이 되는 규모다.)
특히, 메뚜기떼 군집은 말 그대로 참새를 따위로 취급할 정도로 농촌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참새가 곡물을 쪼아 먹었다면 메뚜기떼는 농작물 자체를 쓸어 버렸다.
그리고, 일본뇌염, 뎅기열, 황열, 웨스트나일열, 말라리아, 이질, 장티푸스, 살모넬라, 콜레라 등의 각종 질병들을 옮기는 질병의 매개체 역할을 하던 모기와 파리도 포식자인 참새가 없어지면서 폭발적으로 번식, 전염병을 대규모로 퍼뜨렸다.
결국 식량 생산량은 낮아지고 질병 발병률은 높아져버린 인류사 전체로 봐도 드물 정도의 악재가 겹쳐졌다.
모택동과 당 지도부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곡식 사이사이에 해충이 못들어가도록 다닥다닥 간격을 좁히고 모아서 씨를 뿌리라 했는데, 이는 해충을 더 도와주는 꼴이었고 그 다음해에도 농사는 그야말로 작살이 났다.
결국 당 지도부는 소련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시쵸프(러시아어 발음은 흐루쇼프)에게 빌어 연해주에서 20만 마리의 참새를 공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참모들이 모택동에게 이 참새 전쟁을 계속할지 물으니 이 모든 사태의 장본인인 모택동은 다시 다음과 같이 교시한다.
"됐어(算了, 쏸러)."
그리하여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모택동의 한 마디에서 시작된 이 무의미하고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는 참새 도살극은 중국인은 물론 중국어를 배우는 타국인이라도 누구나 구사할 수 있는 단순한 두 음절이 모택동의 입에서 나옴으로써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후 계속 이어진 제사해(참새.쥐.모기.파리 없애기) 운동에서 4해 중 참새는 바퀴벌레로 바뀌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한 나라의 지도자의 무식하고 잘못된 말 한마디가 불러온 참사의 대표적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