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 꼭 재방 보시길...
1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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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조선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더이상 조선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부친은 9살 유일한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미시간대 경영학 학사, 캘리포니아대 MBA 그리고 스텐포드 법학 박사......
미국에서 사업으로 수년간 번 돈으로 일제 강점기 조국에 돌아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약이 없어 죽어 나가는걸 보고 유한양행을 창업하니 그의 나이 31세였다.
국민들이 건강해야 조국을 되찾을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유한양행은 한때 모든 일본 제약회사를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6.25로 유한양행 자산의 80%를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후 재기에 성공한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집요하게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무시했고 탄압을 극복하고 나니
또다시 박정희 정권에서 정치자금을 요구받지만 역시 거절한다.
거절에 대한 보복으로 무대뽀 세무조사와 약제품에 대한 성분,함량 조사가 된다.
그러나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어떤 꼬투리도 못잡고
박정희 정권은 그와 유한양행을 건드릴수 없었다.
천하의 정주영,이병철 조차 자유로울수 없었던 시절 그는 단호했다.
어느덧 그의 나이 70이 되며 회사 임원들은 후계구도를 주장하고 당시
미국에서 잘나가던 변호사였던 큰아들을 추천하지만
"변호사 따위가 회사 경영을 할수 있겠나?" 하며 무시했다.
결국 전문경영인을 대표로 앉히고 은퇴하고 몇년후 1971년 76세 나이로 영면한다.
유언장이 충격적인게 그의 재산 처분에 관한거다.
1. 아직 미성년자인 손녀딸에게 대학 학자금 1만$을 상속한다.
2. 내 아내이자 니들 엄마는 니들이 잘 보살피라 믿는다.
모든 재산은 공익법인에 기부한다.
자녀들도 모두 그게 우리 집안 가풍이라고 인정했다.
그래서 유한양행 최대주주는 비영리 공익법인이고
지금까지 유한양행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3~6년 단위로 대표가 바뀌며 운영되고 있다.
그누구도 소유할수 없는 매뉴얼을 그가 살아 생전 만들어 놨다.
꼬꼬무를 보며 몰랐던 사실은 1945년 미국 C.I.A 전신인 OSS에서 류박사가
한반도 침투조 팀장이었다는거....
그리고 조선 입국 직전 서재필 선생이 그려준 버드나무 그림이 유한양행 마크가 되었다는거...
9살 어린 소년이 홀로 미국에 유학가서 30살 넘어까지 미국에서만 살았음에도
조국과 민족을 잊지않고 모든걸 던졌다는게 경이롭지 않나?
일본 문부성 1호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간 윤석열 아버지와 너무 대비되지 않나?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유학가는 젊은이들..... 정신줄 단디 챙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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